서리 내린 아침
신새벽 무서리
하이얗게 내려
쪽창밖 건조대엔
눈쌓인듯 햇살 깨끗
구석구석 바람따라
하이얗게 깨끗하게 돌아치며
이 하루 또
잘 살아보라고,
다 받아들이고
다 비우고
다 용서하고
|
詩作 note
가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기온을 되찾는 데에 무진 애를 쓴 이즈막이다. 이제사 명실상부한 만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계절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절기들이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 금세 다시 추워지겠지. 겨울이라는 긴 계절은 이미 한 구석에서 호시탐탐 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테니까. 무서리 몇 번 만에 가을은 초라하게 물러나리라. 어차피 각오는 하고 있으니 서러울 것도 처량할 이유도 없건만 괜시리 심술이 나는 이 심사를 누르기 쉽지 않다.
가을 아주 떠나기 전 따스하고 만만한 추억이라도 한두 개 만들어보려고 나선 길에서 길 잘못 들어 헤매다가, 지는 석양에 눈길 머물러 한동안 눈시울 붉히면서 터벅터벅 무거운 신 끌며 그저 하릴없는 일상만 하루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떠나는구나. 다 떠나는구나. 다 떠난 뒤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지금 열심히 사랑하는 이 전부가 떠나면 사랑한 그 후에는 과연 누가 남아 있을까? 망연히 돌아본 기억이 추억되어 걸음 내딛지 못하고 그냥 멈추어서고 만다. 금방이라도 사랑하는 이 가을조차 떠날 것 같아서...
작년인가 어느 종편 방송을 통해 ‘불꽃밴드’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요즘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K-Pop이나 K-트로트의 열풍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필자가 젊었을 적에는 그룹사운드의 헤비메탈 음악이나 락커들의 전율을 일으키는 샤우팅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그 당시에는 발라드나 리듬앤블루스, 또는 컨츄리송과 재즈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제 길을 찾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트로트는 대세가 아니었고, 실은 ‘도로또’라는 발음으로 부르며 그저 나이 든 사람들이나 술자리에서 부르고 감상하는 뽕짝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각종 특집 기획을 통해서 실력 있는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양산되면서 온갖 무대나 방송 등을 신트로트 조류가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의 잊혀져가는 밴드음악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붐을 조성해보자는 의도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던 듯 하다.
결과적으로 시청율이나 관심도에서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밴드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의 성원은 아낌없이 받았던, 의미 있는 방송이었다.
예전에 팬들의 사랑을 듬뿍 누렸던 유명한 밴드들을 몇 팀 초청하여 벌인 경연이었는데, 최저점을 받으면 탈락하는 형식으로 흥미있게 진행된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을 다툰 ‘부활’과 ‘사랑과 평화’의 연주도 훌륭했으며 다른 모든 출연진들 역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밴드의 최고봉이라고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무대를 선보였는데, 필자도 예전 음악을 사랑하던 한 사람으로 지극한 관심을 보이며, 자주 바뀌는 순위에 손에 땀을 쥐면서 본방사수로 한동안 열광했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특별한 각광을 받은 공연은 아니었지만 그 중에 ‘다섯 손가락’의 기타리스트이며 객원싱어였던 ‘이두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라는 곡이 있었다. 본래 이 곡은 ‘들국화’의 ‘전인권’이 부른 번안곡이었다.
원곡은 영국의 포크송 가수인 ‘Al Stewart’가 부른 ‘베르샤유의 궁전’이었는데 전인권이 본인의 감성을 버무려 심도있는 작사를 하고, 특유의 거친 음색으로 토해내듯이 열창을 한 노래였다. 물론 원곡도 뛰어나지만 그 날 이두헌의 잔잔하고 탁한 음색으로 읊듯이 조용하게 부르는 ‘사랑한 후에’는 단연 압권이었다.
홀린 듯이 듣다가 노래 중간 부분부터는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조차 모른 채 심취해버리고 말았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울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노래가 그토록 슬펐을까? 정작 노래하는 가수가 먼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격한 감정이 이입되었던 건지, 아니면 본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의 허무나 실체를 떠올리며 애수에 젖었던 건지, 혹은 사랑한 후에 지니게 되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설움이 사무치게 되살아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참 많이 흐느꼈었다. 보는 이 없기에 창피할 일은 없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주책없는 짓인 것같아 혼자 퍽이나 민망했었던 기억이다. 지금도 핸드폰에 저장해놓은 그 음악을 이따금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저릿해지곤 하는데, 아마도 그 가수를 향한 팬심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다. 입 속으로 흥얼거린다.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노래 한 곡을 또 떠올린다. 1980년대에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친 대중가요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하는 노래는 사람의 삶을 간결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지적한 가사 때문인지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하고 친숙해서 유난히 심금을 울린다.
처음에는 작가가 ‘조용필’에게 주려고 했던 곡인데 뒷부분의 크게 웃는 소리가 좀 닭살스럽다 여겨 주저하는 바람에, 당시에 지명도가 있는 또 다른 허스키 목소리 ‘위일청’에게 주었다가, 돌고 돌아 결국 ‘김국환’이 재취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는 큰 히트를 치지 못하다가 7년 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삽입곡으로 대중에게 어필되면서 역주행의 기회를 잡았고 순식간에 모든 가요프로그램을 석권하면서 연말에는 온갖 시상도 휩쓸고, 급기야 김국환을 최고의 가수 반열로 이끌었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인생역전의 ‘타타타’였다. 원래 ‘타타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그래 그거야.” 라는 뜻이다. 이 노래를 작사한 ‘양인자’가 1983년에 인도를 여행하던 와중에, 이 의미를 알게 되어 가사를 쓰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인 ‘김희갑’이 곡을 붙여서 노래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서 대중들에게서 멀어졌다 여겼는데 얼마 전 어느 방송에서 ‘김국환’이 신세대 트로트 가수인 ‘별사랑’과 함께 출연하여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애틋하고 처절한 삶의 애환을 버무려 잔잔하게 불러내는 두 가수의 듀엣 공연을 보다가 또 필자는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는 역시 모르겠다. 너무 아름답고 애절한 사연들은 언제나 필자를 울린다. 그냥 울린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명곡이란 바로 이런 곡들을 가리킴이다.
돌아보니 지금 50년 세월을 글쟁이로 늙어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필자도 음악을 퍽이나 좋아하고 각종 음악 활동에 몰입해 있었던 적도 많았던 걸 생각해낸다.
중학교 시절부터 건반과 기타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불었으며, 대학 시절에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서 각종 공연을 하고 대학가요제 본선까지 진출했던 기억과, 대학 생활 중간에 아르바이트로 진행한 기타강습이나 음악다방 DJ의 경험들은 모두 아련하면서도 잊지 못할 음악 관련 추억들이다.
이런저런 여건들이 여의치 않아 연예계로 진출하지는 못했고, 그러면서도 평범하지 못한 사회인으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천직으로 글을 쓰다보니 유난히 감수성과 감정선이 민감하고 예민하여 울고 웃기도 잘 하고, 실망과 실패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는 극기의 삶이 실핏줄마다 새겨진 터수인지라 새삼 뭔가를 이루려고 애면글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다시 다짐한다.
남겨진 이 가을의 일기장에, 앞으로 언젠가 다시 찾아줄 몇 안 되는 가을의 한 페이지에 무엇을 남길까 고민하기 보다는 오늘 서리 내린 아침의 소중함이 어제 지나온 수많은 날들의 진실보다 무겁고, 내일 펼쳐질 숱한 날들의 의미보다 고귀한 오늘 일이라는 걸 얼른 알아차리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