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ΰ
광고
편집  2024.12.06 [20:19]
전체기사  
여론광장
회원약관
청소년 보호정책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HOME > 여론광장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44주년” 우리의 현주소
 
소정현기자

 

▲ mbc캡쳐

 

 

박정희 정권몰락 가속화

 

1979년 유신 독재에 반대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시작됐던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44주년을 맞은 국가기념식이 1016일 창원 3·15아트센터에서 대극장에서 시월의 부마 민주주의를 열다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2019년 정부가 최초로 10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면서 부마민주항쟁 역사적 주목도가 더욱 뜻깊어졌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민주화운동은 부마민주항쟁까지 7개로 2.28민주화운동, 3.15민주의거, 3.8민주의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기념일, 부마민주항쟁 등이다.

 

부마민주항쟁19791016일부터 10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소재지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분노의 시위가 촉발된 것을 말한다.

 

197910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과 학생이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주항쟁(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4대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일컫는다. 더욱이 부마항쟁에 이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6월 항쟁으로 계승돼 한국민주주의를 한 단계 가일층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군부 독재 사슬을 끊어내고 민주주의가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부마민주항쟁은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여 박정희 유신체제 종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시민항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 부마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전국적인 배경으로 장기독재와 억압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 나아가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에 겹쳐 터진 제2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위기였다.

 

나아가 197812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는 금권, 관권선거에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민주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지지율에서 패배했다. 다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은 더 얻었다. 그 후 민주화 시위가 널리 퍼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다. 특히 197910월 초, 경제위기로 임금을 못 받은 가발수출업체 YH무역 여공들이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다. 박정희 정권이 경찰을 투입해 당직자를 포함해 무차별로 폭력을 가하고 끌어내자,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독재정권을 왜 미국이 지원하느냐고 비판했다.

 

잇따라 의정 사상 처음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는 결국 부마항쟁을 폭발시켰다. 5·18민주화운동이 김대중 대통령 구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듯, 부산·마산을 대표하는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에서 제명한 것이 촉발제가 된 것이다.

 

시민운동 화이트컬러, 노동자, 상인까지

 

197910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197910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선언문이란 유인물은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포하였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다수가 다쳤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 시위대에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한편,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0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5·18민주화운동과 밀접하게 연결

 

현대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가 원래부터 호남 대 영남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바로 ‘197910월 부마(민주)항쟁이다. 우리의 지역주의가 영남 대 호남의 갈등이라고 생각하지만, 대구경북의 박정희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인 부산과 마산이었다. 이 점에서 부마항쟁과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를 무너지게 하는 그 의미와 무게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그 의미와 배경, 사회경제적 분석이 비교적 많이 이뤄졌지만 부마민주항쟁은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이다.

 

부마항쟁을 비롯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불의에 저항한 우리 국민의 긍지요 자부심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사에 결정적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44년이 되도록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11851, 2013.6.4. 제정)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대통령령 제24901, 2013.12.4. 제정)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에 응당 부마민주항쟁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과 그에 상응한 유공자관련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울러 부마항쟁이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국가폭력 가해자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가려야 하고 이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려면 항쟁 의의를 정확히 알리는 역사 교육과 더불어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와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밴드 밴드 구글+ 구글+
기사입력: 2023/10/20 [21:12]  최종편집: ⓒ 투데이리뷰 & 영광뉴스.com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게시물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이 되지 않은 선거관련 지지·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18-05-31~2018-06-12)에만 제공됩니다.
일반 의견은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제52대 장 세 일 영광군수 취임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영광군사회복지행정연구회 ‘나눔캠페인 현금 기탁’ / 사회부
㈜하이메디칼, 영광군에 건강식품 기탁 / 경제부
‘공존회’ 희망 캠페인 영광군에 쌀 기탁 / 운영자
기부모임“영광백클럽”나눔캠페인 민간1호 / 경제부
‘리스본으로의 마지막 여행’ / 문화부
연말연시 ‘온기나눔’ 3개월간 집중 운영 / 사회부
"수술전 각막 두께 500마이크론 이상" / 김선후 원장 / 연수늘밝은안과
계엄 불발 “금융·외환시장 유동성 무한 공급” / 정치부
더불어민주당 ‘윤석열은 퇴진하라’ / 정치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회원약관청소년 보호정책 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ΰ 발행인·편집인 蘇晶炫, 발행소:영광군 영광읍 옥당로 233-12, 청소년보호책임자 蘇晶炫 등록번호 전남 아00256, 등록일자 2014.09.22, TEL 061-352-7629, FAX 0505-116-8642 Copyright 2014 영광(전남) 뉴스 All right reserved. Contact oilgas@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 영광(전남) 뉴스에 실린 내용 중 칼럼-제휴기사 등 일부 내용은 본지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영광(전님) 뉴스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지는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강령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