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권’ 몰락 가속화
1979년 유신 독재에 반대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시작됐던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44주년’을 맞은 국가기념식이 10월 16일 창원 3·15아트센터에서 대극장에서 ‘시월의 부마 민주주의를 열다’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2019년 정부가 최초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면서 부마민주항쟁 역사적 주목도가 더욱 뜻깊어졌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민주화운동은 부마민주항쟁까지 7개로 2.28민주화운동, 3.15민주의거, 3.8민주의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기념일, 부마민주항쟁 등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소재지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분노의 시위가 촉발된 것을 말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과 학생이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4대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일컫는다. 더욱이 부마항쟁에 이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계승돼 한국민주주의를 한 단계 가일층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군부 독재 사슬을 끊어내고 민주주의가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여 박정희 유신체제 종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시민항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 부마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전국적인 배경으로 장기독재와 억압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 나아가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에 겹쳐 터진 제2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위기였다.
나아가 1978년 12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는 금권, 관권선거에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민주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지지율에서 패배했다. 다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은 더 얻었다. 그 후 민주화 시위가 널리 퍼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다. 특히 1979년 10월 초, 경제위기로 임금을 못 받은 가발수출업체 YH무역 여공들이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다. 박정희 정권이 경찰을 투입해 당직자를 포함해 무차별로 폭력을 가하고 끌어내자,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독재정권을 왜 미국이 지원하느냐고 비판했다.
잇따라 의정 사상 처음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는 결국 부마항쟁을 폭발시켰다. 5·18민주화운동이 김대중 대통령 구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듯, 부산·마산을 대표하는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에서 제명한 것이 촉발제가 된 것이다.
● 시민운동 “화이트컬러, 노동자, 상인”까지
1979년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선언문’이란 유인물은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포하였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다수가 다쳤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 시위대에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한편,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 5·18민주화운동과 ‘밀접하게 연결’
현대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가 원래부터 호남 대 영남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바로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다. 우리의 지역주의가 ‘영남 대 호남의 갈등’이라고 생각하지만, 대구‧경북의 박정희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인 부산과 마산이었다. 이 점에서 부마항쟁과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를 무너지게 하는 그 의미와 무게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그 의미와 배경, 사회경제적 분석이 비교적 많이 이뤄졌지만 부마민주항쟁은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이다.
부마항쟁을 비롯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불의에 저항한 우리 국민의 긍지요 자부심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사에 결정적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44년이 되도록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제11851호, 2013.6.4. 제정)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대통령령 제24901호, 2013.12.4. 제정)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에 응당 부마민주항쟁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과 그에 상응한 유공자관련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울러 부마항쟁이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국가폭력 가해자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가려야 하고 이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려면 항쟁 의의를 정확히 알리는 역사 교육과 더불어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와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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